사진: 고든무어, 크레이그 바렛, 앤디 그루브, 폴 오켈리니 앤디 그루브
Episode 6. 노이스의 스톡옵션 파동
1957년 지구 반대편에서 대기권을 향해 솟아오른 한 대의 로켓은 페어차일드사는 물론 트랜지스터라는 개념 자체의 가치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8인의 배신자들에 의해 탄생된 페어차일드사는 실리콘이란 소재를 이용해 제품을 생산한 최초의 회사이기는 했지만 트랜지스터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제품을 생산한 유일한 회사는 아니었다. 달라스에 위치한 텍사스인스트루먼트, 피닉스에 위치한 모토롤라, 보스턴의 트랜지스톤(Transitron)과 레이디온(Raytheon) 등도 보다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트랜지스터의 상용화에 온갖 정열을 쏟아붓고 있었다. 당시의 트랜지스터 산업은 정교한 접합 기술이 요구되는 정밀산업이었지만, 페어차일드사는 오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트랜지스터를 생산해 냈다.
사실 페어차일드의 생산 공정은 100퍼센트 수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으며, 실리콘의 접합과정이나 도핑(불순물을 첨가하는 과정)의 정확성에 따라, 크게는 총 생산량의 90퍼센트가 불량품으로 돌변해버렸다. 이렇듯 비생산적인 수작업 과정은 고스란히 트랜지스터의 가격을 인상시키는 주범이 되었고, 노이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획기적인 기술인 집적 회로 또는 IC(Integrated Circuit) 방식을 개발하게 되는데, 이 새로운 개념은 정확히 10년 후 그가 창립하게 될 인텔사의 "메모리칩과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을 예고하는 전주곡이 된다. 1959년 노이스가 집적 회로의 개념을 탄생시킬 무렵, 트랜지스터 테크놀로지는 더 이상 윌리엄 쇼클리와 8인의 배신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집적 회로의 실질적인 창안자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사의 잭 킬비(Jack Kilby)라는 엔지니어였는데, 그는 페어차일드사의 노이스보다 6개월 앞서 집적 회로 방식으로 IC 칩을 독자적으로 선보였다. 그러나 킬비의 집적 회르는 게르마늄 소재를 이용한 제품이었고, 노이스와 호어니가 6개월 후 탄생시킨 실리콘 소재의 집적 회로 방식은 게르마늄 소재보다 월등히 효율적이며 우수한 생산성을 입증하면서, 페어차일드사의 IC 칩 제품은 반도체 시장의 부동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페어차일드사의 집적 회로 칩은 마이크로칩이란 명칭으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며, 에디슨의 전구와 리 디 포레스트(Lee De Forest)의 진공관이 해낼 수 없는 모든 문제들을 일반 테크놀로지가 아닌 '하이-테크놀로지'라는 이름으로 해결하게 됨으로써, 8인의 배신자들은 뉴욕의 페어차일드 본사로부터 경영권을 인계해 달라는 공식적인 통보를 받게 된다.
시작부터 페어차일드사는 8인의 배신자들을 위한 조직은 아니었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뿔뿔이 각자의 행보를 결정하게 될 이들에게 본사의 경영권 인수는 앞으로 이루어질 페어차일드사의 스핀오프에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되며, 이들에게는 당시 시세로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 25만 상당의 스톡옵션이 주어진다. 뉴욕 본사의 실질적인 경영권 인수는 마이크로칩의 대량 생산을 의미하며, 페어차일드사는 HP와 함께 본격적으로 모래알을 황금알로 전화시키기 시작한다. 60년대 노이스의 페어차일드(뉴욕 본사는 페어차일드의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노이스를 월급쟁이 사장으로 임명한다)는 미 항공우주국(NASA)이 계획하는 스페이스 프로그램에 적용되는 마이크로칩을 공급하게 되는데, 노이스의 IC 칩은 에니악(ENIAC)보다 3천 배나 작은 모습으로 제미니호의 내부에 컴퓨터를 장착시키게 되고, 1969년에는 아폴로 11호의 선장인 닐 암스트롱으로 하여금 인간의 첫 발자국을 남기는 역사적인 업적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페어차일드사의 화려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8인의 배신자들의 큰 뜻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비좁은 공간이었다. 보수적인 뉴욕 본사의 경영스타일은 프리 스타일을 추구하는 실리콘 밸리의 엔지니어들에게는 족쇄로 작용했고, 반도체의 기본 개념도 이해하지 못하는 동부의 관료들에게 모든 중요한 결정권을 빼앗긴 8인의 배신자들은 서로 각자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이 과정이 바로 페어차일드사의 전설적인 스핀오프로 알려지게 된다.
1968년 노이스는 페어차일드사의 전 직원에게 스톡옵션을 제공하자는 자신의 제안이 거절되자 8인의 배신자들 중 마지막으로 고든 무어와 함께, 인텔사를 설립하면서 스핀오프의 대장정을 마무리 짓는다. 특히 마지막 페어칠드런으로 알려진 노이스와 무어는 첫 번째 쿠데타를 성공시키는데 자금줄을 대준 아서 록을 다시 찾아가게 되는데, 이들은 단 하루(정확히 전화 두 통으로)만에 인텔사의 설립에 필요한 벤처 자금을 조달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노이스와 무어의 독립적인 행보는 제2의 쿠데타를 이끌 인텔사의 탄생을 알리는 계기가 됐으며, 노이스는 인텔사의 창립 후 첫 번째로 "전 사원(화장실 청소부터 사장인 자신까지)의 스톡옵션 제도"를 주창했다.
모든 이가 소유한 우리의 회사라는 슬로건과 함께, 회사의 성공으로 생성된 부의 분대를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표출해 낸 최초의 조직으로 성장시켜 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노이스의 파격적인 정책은 모든 벤처리스트들에 의해 복제되어 오늘날 실리콘 밸리들의 백만장자들은 거의 모두가 스톡옵션이라는 매우 특이한 제도에 의해 누구보다도 빠르게 거부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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