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9. '리사'와 '매킨토시'의 줄다리기
<잠깐! 매킨토시는 프로젝트 명이명서, 운영체제 명이며, 컴퓨터 이름이다. 물론 리사도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즉 코드명 리사와 매킨토시는 하드웨어와 운영체제 그리고 기본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추진하여, 이 세 가지를 모두 하나의 패키지로 판매한 밸리 역사상 전례가 없는 유일무이한 프로젝트인 것이다.>
코드명 '리사'는 스티브 잡스의 딸인 리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에서부터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리고 Large Integrated Software Architecture의 약자라는 설까지 매우 다양한 해석이 난무하지만, 애플사의 내부에서 극비리에 진행된 리사 프로젝트는 결코 잡스의 지휘하에 일사천리로 추진된 프로젝트는 아니다. 워즈니악이 떠나고 없는 애플컴퓨터사는 누가 뭐라 해도 잡스의 회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보면 겉보기와는 사뭇 달랐다. 애플사의 실질적인 자금줄인 마이크 마큘라는 잡스의 리사 프로젝트를 휴렛팩커드에서 실무 경험을 인정 받은 존 카우치(John Couch)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했다. 잡스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워즈니악 다음으로 애플컴퓨터사를 성장시킨 일등 공신이 자신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존 카우치라는 풋내기 매니저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뺏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마큘라였지만 20대의 젊은 청년 잡스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세상이 불공평했다. 하지만 마큘라의 눈에 비친 잡스는 아직 물불을 못가리는 철부지에 불과했고, 애플사의 미래가 걸려있는 리사 프로젝트는 좀더 실무 경험이 풍부한 카우치가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IBM PC의 핵폭격으로 경영상태가 극히 악화된 애플사는 리사 프로젝트를 계기로 대대적인 인사 개편을 단행한다. 워즈니악의 초창기 시대부터 침몰직전까지 애플호의 경영을 책임졌던 마이크 스캇(Mike Scott)은 동반 폭락한 주식과 시장 점유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고, 워즈니악은 은근슬쩍 애플사의 선발진에서 사라져버렸다. 마큘라는 선택의 여지없이 자신의 후임자인 존 스컬리(John Sculley)를 결정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경영일선에 복귀하게 되고, 공석으로 남은 마큘라의 전 자리인 애플사의 회장직은 자연스럽게 스티브 잡스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는 애플사의 공동 창업자였으며, 워즈니악이 없는 애플사에서 항상 넘버원으로 활동해왔다. 리사는 존 카우치와 제록스 파크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해온 프로그래머인 레리 테슬러(Larry Tesler)에 의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잡스는 서서히 의기 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레리 테슬러는 1979년 잡스에게 GUI 개념을 브리핑해준 파크연구소의 실무 엔지니어였으며, 그가 리사 프로젝트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잡스에게 리사의 상업화는 이제 시간 문제란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했다.
잡스는 리사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프 레스킨(Jeff Raskin)이란 동료 엔지니어의 또 다른 작은 프로젝트였던 코드명 '매킨토시'에 합류하게 되는데, 그는 여기에서 리사 프로젝트와 거의 동일하지만, 훨씬 저렴하고 더욱 엔드 유저를 지양하는 GUI PC를 제작하기에 이른다(오리지널 매킨토시는 제프 레스킨에 의해 추진된 초저가형 PC 프로젝트로 600 달러 선의 퍼스널 컴퓨터 제작에 초점을 둔, 말 그대로 리사와는 상극을 이루는 애플사의 비밀 프로젝트였다). 그런 와중에 잡스는 리사의 실패를 직감적으로 예감하게 되었다, 3000 달러 선에서 판매되고 있는 PC 시장에서 최소한 1만 불이라는 고가 정책을 펼쳐야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리사의 상업성에 상당한 회의를 품게 되었고, 자신의 매킨토시는 리사의 모든 장점을 보유하는 동시에, IBM PC 클론들과 경쟁할 수 있는 저렴한 컴퓨터라는 사실에 은근히 자부심을 갖게 된다.
잡스의 예상대로 매킨토시보다 1년 먼저 시장에 선보인 리사는 사용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존 카우치를 희생양으로 놓고 펼쳐진 리사와 매킨토시 프로젝트의 줄다리기는 스티브 잡스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고, 잡스는 그토록 원하던 자신의 혼이 담긴 컴퓨터를 갖게 되었다. 1984년 판매된 매킨토시 128K는 스티브 잡스의 진정한 '정신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토록 떨쳐버리고 싶었던 워즈니악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기쁨도 안겨주었다. 하지만 잡스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매킨토시가 PC 클론을 상대로 경쟁력 있는 컴퓨터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제2단계인 마케팅 전력에서 새로 부임한 사령관인 존 스컬리와의 성격 차이로 인해, 잡스는 1998년 아이맥(iMAC:Internet Macintosh)으로 화려하게 컴백하기까지 12년간 고독한 유배생황을 하게 된다.
애플사가 처음으로 전문 경영인으로 모셔온 존 스컬리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컴퓨터의 컴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동부의 전형적인 엘리트 관료였다. 그는 추락하는 펩시콜라사에 획기적인 마케팅 전략을 도입해 구사일생으로 살려놓은 업적을 인정받아 애플사의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되었지만, 그는 곧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왜 인텔, HP,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같은 전문 기업들이 엔지니어 분야의 경력자를 최고 경영진으로 두는지를 말이다.
존 스컬리의 최선에도 불구하고 애플사는 1985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사를 떠날 무렵 결코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던 빌 게이츠의 매킨토시 모조품인 '윈도 95'에 필적할 어떠한 방어 전략도 세워놓지 못한 채 무릎을 꿇게 된다. 1985년 애플사의 매출액은 15억 달러로 겨우 1억 달러를 육박하던 빌 게이츠의 MS사보다 15배가 넘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인사가 만사라는 옛말을 입증하듯 잡스가 떠난지 정확히 10년만에 애플사는 아무런 명분도 남기지 못한 채 매킨토시 OS 7 버전보다 기능면에서 전혀 우수성을 인정받지 못한 윈도 95에게 치욕적인 백기를 든 것이다. 애플사는 닫힌 회사였다. 스티브 잡스의 오만함은 애플사 특유의 NIH(Not Invented Here) 주의, 즉 "여기서 발명되지 않았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독선적인 태도를 모든 엔지니어들에게 심어줬고, 그 결과 외부에서 개발된 알찬 테크놀로지들을 수용하는데 매우 배타적이었다. 게다가 실리콘 밸리의 제1원칙이었던 '볼륨 정책'을 무시한 스컬리는 매킨토시 상품의 마진률을 극대화시키는 데만 힘썼을 뿐, 정작 중요한 시장 점유율에는 관심이 없었다. 애플사는 실리콘 밸리의 변경에서 '두 명의 스티브'를 너무 빨리 잃었고, 그들의 소중함을 깨닫는데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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