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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복구정보/IT NEWS

(펌)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 Episode10

by CBL 2018. 7. 19.




pisode 10. 메모리칩과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

60년대 지적재산권에 대한 실리콘 밸리의 일반화된 상식은, 누구든 먼저 상품을 선보이면 그것으로 지적소유권이 인정되는 분위기였고, 크로스 플랫폼 라이선스에 관한 법적 조항 역시 상품의 제작 시 상호 특허권을 도용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유권해석이 가능한 애매모호한 법률들이 많았다. 이에 지난 30년 동안 실리콘 밸리에서는 특허권에 대한 법정 시비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것이 엔지니어들 못지 않게 이곳 실리콘 밸리를 변호사들의 천국으로 탈바꿈시켜놓았다. 실리콘 밸리는 일반 제조 산업에 비해 법의 잣대에 의해 회사의 명암이 갈라지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빈번한 편이다. 1968년 인텔사는 두 가지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나는 노이스와 무어의 명성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들을 따르는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하지만 회사를 설립한 직후 노이스와 무어가 바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반도체 상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집적회로 테크놀로지를 통해 생산되는 IC 제품들은 페어차일드를 비롯한 여러 반도체 회사들이 벌써 양산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인텔사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아무리 우수한 IC 제품을 생산해 낸다해도, 볼륨 싸움에서 인텔은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결국 노이스와 무어는 기존의 반도체 산업이 가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상품을 창출해 내야만 했는데, 이 때 그들이 선택한 상품이 바로 집적회로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메모리칩이었다. 노이스가 발명한 집적회로 테크놀로지는 사칙 연산을 요구하는 일반 로직 칩으로만 상용화되어 있었을 뿐, 컴퓨터 시장은 아직도 비효율적인 자심(Maganetic Core) 기억장치를 표준 메모리 테크놀로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자심 기억장치는 제조하기 쉽다는 장점을 제외하면, 아무런 장점도 없는 골칫거리였다. 인텔은 메모리칩을 전략 상품으로 선정한 후, 고든 무어의 지휘 아래 첫 번째 프로토 타입의 제작에 모든 역량을 쏟게 된다.

노이스와 무어는 시간이 없었다. 인텔에게 시간은 곧 돈을 의미했고, 한시라도 빨리 이윤을 창출해내지 못하면 노이스와 무어의 명성으로 유치할 수 있는 자금도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인텔이 뛰어난 엔지니어들을 보유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형 경쟁업체들과 비교한다면 이들의 인력이나 자본은 양의 경쟁에서 승산이 없었다. 그런데 고든 무어에게는 프레데릭 파긴이라는 비밀병기가 있었다. 이태리 출신의 교환 연구원이었던 파긴은 인텔의 비전에 미료된 영주권을 취득, 인텔사로 자리를 옮겨 테드 호프, 조엘 카프와 함께 역사적인 DRAM과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상품화 과정에서 현격한 공을 세운 인텔의 레인메이커이다. 조엘 카프의 1102 칩을 첫 번째 상품으로 생존의 기반을 닦은 인텔은, 테드 호프가 고안해 낸 새로운 개념의 DRAM 방식을 채택한 1103 칩을 히트시키면서 메모리칩 관련 분야의 선두주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메모리 상품의 성공은 반도체 시장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인천상륙작전과도 같았으며, 이후 노이스와 무어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상품화로 대세를 굳히게 된다. 1103 메모리칩의 상업적 성공은 인텔사의 확장을 의미했고, 이 시점부터 인텔사는 무어의 법칙에 준하여 거침없는 기술 혁신을 일궈내 80년대 후반 마이크로소프트사와 함께 '윈텔 제국'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인텔사를 윈텔 제국으로 탄생시킨 일등 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마이크로프로세서였으며, 고든 무어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품평회 자리에서 "인텔의 4004 칩은 인간이 창안해 낸 상품들 중 가장 혁명적인 상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인텔의 상징으로 굳어진 X86 시리즈의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노이스와 무어의 참모진에 의해 체계적으로 추진되어진 메모리칩 프로젝트들과는 달리, 일본의 한 전자 계산기 제조업체가 청탁한 집적회로 로직 칩 세트의 상품화 과정에서 테드 호프가 구상한 서브루틴이란 기발한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부시콤이라는 일본 기업이 인텔에게 데스크톱 전자 계산기에 필요한 8개의 독립적인 로직 칩의 디자인을 의뢰했는데, 창립한지 3년도 안된 인텔이 8개의 독자적인 로직 칩을 디자인 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테드 호프는 DRAM의 기적에 이어 또 한번 해결사로 나서게 된다.

즉, 그는 부시콤의 엔지니어들에게 8개의 독립적인 로직 칩을 디자인하는 대신, 서브루틴(Subroutine)이라는 기능을 이용해 8개의 칩 기능을 하나의 칩에 응집시킨 다목적 로직 칩을 디자인하는 것이 가격이나 성능 면에서 훨씬 효율적일 수 있다는 제안을 하게 된다. 그는 즉흥적으로 이 새로운 칩에 포함될 램, 롬, I/O 장치 그리고 메인 프로세서의 디자인을 설명하는 천재성을 발휘하는데, 노이스와 무어는 물론 일본 부시콤의 담당 엔지니어였던 시마에게도 이론상 전혀 하자가 없다는 확신을 받아낸다. 그러나 여기서 인텔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맛보는 운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인텔의 기업 모토는 "인텔은 배달한다(Intel Delivers.)"였다. 즉, 인텔은 어떤 난관을 뚫고서라도 상품을 적기에 공급하는 신용도가 최대 강점인 회사였다.

그런데 테드 호프가 약속한 다목적 로직 칩의 진행과정을 점검하러 출장 나온 부시콤사의 시마에게 보여줄 수 있는 칩의 디자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마의 출장을 관장한 파긴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지금부터라도 칩 디자인에 착수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인텔의 신용도에 치명타를 안겨준 이 프로젝트는 결국 파긴의 통제하에 원점에서 다시 진행되고, 파긴은 테드 호프를 능가하는 천재성을 발휘하며 3개월만에 완벽한 프로토 타입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3개월이라는 시간은 부시콤의 경쟁 업체로 하여금 경쟁 상품을 우선적으로 시장에 선보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인텔사는 계약 위반의 책임을 물어 계약 조건을 부시콤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수정하게 된다.

노이스는 이 과정에서 금전적인 모든 손해는 감수하지만, 기존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던 다목적 로직 칩의 디자인에 대한 소유권을 부시콤사에서 인텔사로 이전하게 되는데, 만약 이때 노이스가 이 칩의 디자인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 회사로서의 인텔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테드 호프가 계획대로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면 인텔사는 마이크로프로세서 디자인의 소유권을 태평양 건너 섬나라에 넘겨주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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