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 Episode27

Author : 복구박사 복구박사 / Date : 2018.07.19 13:34 / Category : 데이터복구정보/IT NEWS





Episode 27. 실리콘 밸리의 터미네이터

지난 1월부터 진행된 '실리콘 밸리 스토리'의 제1부 에피소드들에는 빌 게이츠의 이야기가 빠져있다. 많은 독자들이 분명 PC 산업의 절반 이상으로 성장한 소프트웨어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기적적 성공담이 빠져버린 것을 의아해 할 것이지만, 이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빌 게이츠는 실리콘 밸리의 인물이 아니며, 팔로알토를 중심으로 지난 30년간 줄기차게 성장한 실리콘 밸리의 지도상에는 빌 게이츠의 자취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정확히 25년 전 창업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실리콘 밸리는 물론 캘리포니아 주에 조차 한 번도 연고를 두지 않고 지금까지 사업을 추진한 매우 독특한 기업이다. 사실 실리콘 밸리에 적을 두지 않고 PC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들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동부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IBM사를 선두로, 한 때 소프트웨어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한 미치 카포의 로터스사도 보스턴의 '루트 128' 지역에 기반을 두고 성장했으며, 현재 네트워크 시장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노벨사 또한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Salt Lake) 시에 기반을 둔 회사다. 하드웨어 측면에서 보아도, 텍사스인스트루먼트사나 모토롤라사 역시 서부 지역과는 무관하게 성장했지만 실리콘 밸리의 팽창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웃사이더들의 성공담은 시작부터 실리콘 밸리와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고, 이들의 성장 과정은 지리적 위치의 차이만 있을 뿐 실질적으로 밸리의 성장과 맥을 같이 해왔다.

그렇다면,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도 앞에서 언급한 아웃사이더 기업들 중의 하나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PC 시장을 언급하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명사처럼 부각되어 버린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성공담은 분명 실리콘 밸리에 지각 변동을 일으킨 많은 사건들의 주인공이지만, 애석하게도 실리콘 밸리의 터줏대감들인 디지털리서치사, 애플사, 휴렛팩커드사, 썬마이크로시스템사, 그리고 실리콘그래픽사사는 빌 게이츠의 긍정적인 영향보다는 부정적 측면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PC 시장에서 가장 운이 놓은 남자, 소프트웨어 시장을 실리콘 밸리에서 도려내 간 장본인, 밸리의 낭만주의자들을 매몰차게 몰아낸 현실주의자, 그리고 윈텔이라는 제국주의로 실리콘 밸리의 모든 기업들을 종속 관계로 탈바꿈시킨 혁명주의자 등이 실리콘 밸리가 빌 게이츠에게 부여한 여러 수식어들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실리콘 밸리에 '윈텔'이라는 '그들만의 리그'를 창출했으며, 그들이 일구어낸 거대한 제국은 실리콘 밸리의 대부분의 기업들을 '안티-윈텔'이라는 새로운 연합 체제로 몰아버렸고, 이들은 지금까지도 위협적으로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을 여러 각도에서 조율하고 있다.

무일푼으로 뉴멕시코 주의 알버커키 시에서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를 선보인 에드 로버츠의 미츠사를 배신하면서 실리콘 밸리로 진입한 빌 게이츠는, 당시 PC 시장에서 운영체제의 표준을 설정한 게리 킬달의 CP/M 운영체제를 교묘한 상술로 도용하여 'MS-DOS'라는 새로운 표준 설정으로 입지를 확보했다. 그 후 애플사 몰락 과정의 가장 큰 수혜자로서 혹은 IBM사의 후광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기업으로서, MS사는 실리콘 밸리라 불리는 태양계에 존재하는 별은 아니지만 이 곳에서 생명력을 키워가고 있는 모든 위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산소 공급책 역할을 하는 공룡 기업으로 자라났다.

제2부인 '윈텔과 안티-윈텔'은 빌 게이츠와 앤디 그루브의 신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앞으로 3개월에 걸쳐 진행될 윈텔의 성공담은 마이크로소프트사와 인텔사의 성공담인 동시에 실리콘 밸리의 많은 천재들을 좌절시킨 비극적 사건들로서, 필자는 애플사의 매킨토시 라이선싱 비화를 시작으로 게리 킬달과의 DOS 분쟁, 그리고 IBM사와의 줄다리기를 마지막으로 윈텔과 안티-윈텔의 성장 과정을 가감없이 기술해 보려고 한다.

Tags :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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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 Episode26

Author : 복구박사 복구박사 / Date : 2018.07.19 13:32 / Category : 데이터복구정보/IT NEWS




Episode 26. 세상에 뿌려진 윈도만큼...


1995년 7월 14일 미국 워싱턴 주 레드먼드(Redmond)시에 위치한 MS 본사의 작은 건물에는 여러 박스의 샴페인이 배달되면서 모종의 파티가 준비되고 있었다. 샴페인을 손에 쥔 초췌한 모습의 한 프로그래머는 "이제 더 이상의 수정은 없다!"라는 환희에 섞인 외침과 함께 지난 3년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한 윈도 95 운영체제의 1,400만 줄에 달하는 코드가 완성된 기쁨을 뇌까리고 있었다. 1992년 초부터 3년 6개월간 코드와의 전쟁을 치룬 이 프로그래머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PC 시장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그려보면서, '시카고 프로젝트'의 쫑파티를 만끽했다.

빌 게이츠가 MS사의 모든 것을 걸고 추진해 온 시카고 프로젝트는 출시 예정일을 2년이나 넘기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95년 8월 25일을 D-데이로 전세계 PC 운영체제 플랫폼의 GUI 혁명을 단행할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제 이들에게 남은 것은 8월 24일 사용자들의 한마당 잔치를 뒤편에서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윈도 95의 출시는 말 그대로 월드컵을 방불케 하는 세계인의 대축제였다. 자본주의 탄생 이래 한 상품의 출시를 놓고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광분한 적은 없었다. 윈도 95라는 상품을 축으로 형성된 주변 상품들의 마케팅 전략과 윈도 마니아들의 카운트다운 공세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윈도 95 파티는 전세계의 PC 산업에 유례없는 호황을 선사해 주었다. 윈도 95의 출시로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486에서 펜티엄 프로세서로 대전환을 시작했고, 16메가 메모리 칩, 기가바이트가 넘는 하드 드라이브, CD-ROM 드라이브 그리고 15인치 이상의 대형 모니터들의 표준화는 PC 시장의 규모를 순식간에 두 배로 확장시켜 버렸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산업과 같은 직접 관련 산업은 제외하더라도, 윈도 95의 열풍은 PC 관련 출판 산업, 기업 및 일반 사용자들의 정보 서비스 그리고 각종 액세서리 상품과 같은 간접 산업들로 확산되었고, PC 시장은 GUI 운영체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실리콘이 파생시킬 수 있는 각 종 간접 산업을 새롭게 태동시키거나 기존의 PC 상품들을 한 단계 진화시켜 나갔다.

"드디어 원시적인 도스 운영체제를 탈피한 꿈의 GUI 운영체제가 PC 시장에 상륙하다!" 세계 유력 일간지들의 헤드라인을 통해 소개된 윈도 95는 빌 게이츠가 단순히 홍보비로만 2억 5000만 달러를 쏟아부은 대작에 걸맞게 전세계 PC 사용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식 판매일을 일주일이나 앞둔 8월 중순부터 윈도 95를 1초라도 빨리 손에 넣으려는 마니아들의 사전 주문은 대부분의 통신판매 업체들의 업무를 일찌감치 마비시켜 버렸고, 출시 전야인 8월 23일에는 각 대도시 대형 컴퓨터 매장이 마치 비틀스의 존 레논이 환생해 사인회를 개최한 것을 방불케 할 정도로 해질 무렵부터 침낭을 어깨에 맨 마니아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지구상에서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호주 시드니 항구의 대형 부두에는 4층 건물 규모의 윈도 95 상자가 공중에 매달려 주변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 날 호주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들에게 윈도 95를 무료로 배포한다는 소식과 함께 낭만의 도시 시드니는 축제의 분위기로 술렁거렸고, 이웃 국가인 뉴질랜드의 한 학생이 8월 24일 0시 1분을 기해 구입한 제1호 윈도 95를 시작으로 디지털 지구촌은 윈도 물결로 요동치게 된다.

지구가 자전을 거듭하면서, 자정을 넘긴 영어권 국가 대도시들의 PC 마니아들은 한결같이 윈도 95의 마법에 이끌려 컴퓨터 매장으로 달려나갔으며, 세계 최대의 도시인 뉴욕 시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면을 뒤덮은 윈도 95 로고로 장식된 대형 배너는 자정을 넘기면서 윈도 95의 공식 테마곡인 롤링 스톤즈의 '스타트 미 업(Start Me Up)'을 내보내 빌 게이츠가 제공하는 '미래로 가는 길'에 동참하려는 PC 마니아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렇게 윈도의 물결은 걷잡을 수 없는 전세계적 신드롬으로 널리널리 확산되어 나갔다.

D-데이였던 8월 24일의 태양은 빌 게이츠를 위해 떠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MS사의 본사가 위치한 워싱턴 주 레드먼드 시의 야외 캠퍼스에는 아카데미 시상식도 훌륭히 치를 수 있는 규모의 초대형 야전 텐트가 15개가 설치되는 등 지상 최대의 컴퓨터 관련 축제의 축포를 터뜨릴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2,500명이 넘는 취재진과 PC 관련 산업의 게스트들도 윈도 95가 어떻게 세상을 변모시킬 것이라는 빌 게이츠의 연설을 듣기 위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미국 최고의 인기 토크쇼 사회자인 제이 레노(Jay Leno)가 이 날 자축연의 사회자로 깜짝 출연하면서 전세계 매스컴들은 MS사의 윈도 95 출시 기념 파티를 마치 월드컵 결승전을 중계하듯이 특종으로 위성 중계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윈도 95의 출시를 앞두고 벌어진 이러한 진풍경을 20년 남짓한 PC 역사상 최고의 대사건이라고 잘라 말하지만, 사실 1995년 8월 중순부터 불기 시작한 윈도 95의 열풍은 하나의 상품 출시를 놓고 일어난 해프닝치고는 산업혁명으로 비롯된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들을 세워나갔다. "95번을 깔아야 제대로 깔린다"라는 일부 사용자들의 푸념에도 불구하고 윈도 95는 데뷔와 함께 소프트웨어 시장의 모든 기록들을 갈아치우면서 출시 6개월만에 2,000만 개라는 천문학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다.

빌 게이츠의 부와 명예는 세상에 뿌려진 윈도만큼 그 위상을 높여가고 있으며, 이제 PC 산업의 모든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이란 질문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엔 빠짐없이 MS사와 빌 게이츠가 언급되고 있다. 1975년 여름, 불과 19세의 나이로 창녀들이 득실거리는 뉴멕시코주 알버커키 시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간판을 올린 지 정확히 20년 만에 윌리엄 게이츠 3세는 PC 시장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의 왕좌에 등극하게 되었으며, 40세 생일을 두 달 앞둔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인물이라는 또 하나의 칭호를 얻게 된다.

전 세계의 PC 사용자들과 행사장에 초청된 대부분의 PC 산업 관련 게스트들이 윈도 95의 대성공을 자축하고 있을 무렵, 그러나 빌 게이츠는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휘말리게 된다. 출시 예정일을 2년이나 넘긴 윈도 95의 뒤늦은 출시는 빌 게이츠와 MS사가 염두에 두고 있던 프로젝트들 대부분의 불가피한 연기를 의미했다. 빌 게이츠 자신이 정확히 15년 전 PC 운영체제의 표준을 정립하면서 단 한 번의 시련 없이 오늘의 영광을 일구어낸 전례를 답습이라도 하듯이, 이름도 성도 모르는 영국의 한 풋내기 프로그래머인 팀 버너스 리에 의해 개발된 HTML이라 불리는 새로운 언어 체계는, 윈도 95의 모체인 시카고 프로젝트가 추진될 시점만 해도 지구상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모자이크커뮤니케이션(Mosaic Communication)이라는 작은 회사에 의해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전혀 생소한 영역을 일구어나가고 있었다. 빌 게이츠가 인터넷 프로젝트를 시카고 프로젝트와 동시에 추진하기는 불가능했다는 현실적 논리와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의 가능성을 자체적으로 과소 평가한 실수를 깨끗이 인정한다 할지라도, 지금까지 PC 시장의 모든 거물 프로젝트들이 표준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주인공 역할을 놓쳐본 기억이 없는 MS사 입장에서 모자이크 브라우저가 월드와이드웹 시장의 부동의 표준으로 자리잡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빌 게이츠는 인터넷이란 미디엄(medium)의 중요성만을 인식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이 분야에서 가진 것이 전혀 없었다. 90년대 초, 대부분의 유닉스 기반 사용자들이 TCP/IP라는 공용 프로토콜을 설립하여 인터넷 정보의 흐름에 대한 표준을 설정할 때, MS사의 애플리케이션 분야를 책임지고 있던 스티브 발머는 TCP/IP의 개념조차 모르고 있었다. 인터넷 온라인 서비스 분야를 이끌어온 삼두마차인 아메리카온라인(AOL), 컴퓨서브(CompuServe) 그리고 프로디지(Prodigy)의 아성에 철퇴를 가할 것을 은근히 기대해 온 마이크로소프트 네트워크(MSN) 프로젝트의 침몰은 MS사를 인터넷의 중심 궤도에서 완전히 탈퇴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미 법무성의 삼엄한 독과점 규제에도 굽히지 않고 과감하게 윈도 95 패키지 안에 포함시킨 MSN 서비스가 윈도 95로 업그레이드하는 상당수의 사용자들이 선택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싸늘하게 외면당함으로써 빌 게이츠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던 MS사의 인터넷 기반은 송두리째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빌 게이츠는 또 다른 추격전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빌 게이츠가 인터넷이라 불리는 새로운 신대륙의 개척을 놓고 펼치게 될 이 새로운 한 판은 대기업들을 상대로 물량 싸움을 이루어 온 과거의 운영체제와 애플리케이션 전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빌 게이츠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적과 동지'의 구분이 전혀 없는 게릴라전을 의미했다. 그리고 윈도 95와 함께 뚜껑이 열린 이 판도라의 상자는 빌 게이츠의 예상을 완전히 초월해 가면서 미래로 가는 진정한 길을 보여주었다.

빌 게이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난 5월 극비리에 수석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돌린 '인터넷 물결(Internet Tidal Wave)'이란 제목의 메모를 MS사가 앞으로 추진하게 될 프로젝트들 가운데 최고의 우선 순위로 선정하면서, 인터넷이라 불리는 정글에 익스플로러(Explorer)라는 신무기를 투입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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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 Episode25

Author : 복구박사 복구박사 / Date : 2018.07.19 13:31 / Category : 데이터복구정보/IT NEWS





Episode 25. 금세기 최고의 상품, 윈도 95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탄생한 윌리엄 쇼클리의 트랜지스터를 시작으로 무어의 법칙에 준하여 앞만 달려온 실리콘 밸리의 하이-테크놀로지들은 9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윈텔'이라는 콤비 플레이로 PC 역사상 최고의 작품을 사용자들에게 선보이게 된다. "뛰어난 예술가는 도용하며,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는 표현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빌 게이츠의 윈도 95는 반세기 실리콘 밸리의 역사가 창출해 온 모든 테크놀로지의 결정체로서, 이 상품의 원천에 대한 의혹과 성능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PC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윈도 95와 펜티엄 프로세서는 진정 금세기 최고의 히트 상품 중의 하나이다. 지난 4년간 이 두 상품의 콤비 플레이는 헨리 포드의 자동차만큼이나 세상을 변모시켰고,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이상으로 세상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파괴시켰으며, 리오 배켈랜드(Leo Baekeland)의 플라스틱만큼이나 보통 사람들의 일상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고,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의 천체 망원경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곳을 보여주었다. 이 두 상품의 콤비 플레이로 새 천년을 이끌어갈 '디지털 경제'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했으며, 이들의 후작(後作)들이 엮어낼 시나리오들을 상상해 본다면 금세기 최고의 상품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찬일 수 없다. 도대체 '윈도'가 뭐기에?

90년대 중반 MS사가 PC 시장에 내놓은 '윈도'와 '오피스' 시리즈 상품들은 일반 사용자들이 매일 접할 수 있는 일반 상품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여러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물론 소프트웨어란 상품이 지닌 '길들여짐'이란 특수성과 물과 공기처럼 단시일 내에 세상의 어느 곳에도 다다를 수 있는 변칙적이면서 파격적인 유통구조는 컴퓨터 산업이 패상시킨 독특한 장점이지만, 빌 게이츠는 그 누구도 쉽게 해내기 힘든 '카운트다운'이라는 마니아적 요소까지 겸비한 '꿈의 상품'을 지난 10년간 PC 시장에 뿌려왔다. 한 상품이 소비자들에게 카운트다운이라는 진풍경을 연출시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이러한 해프닝은 판매자 쪽에서 의도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상업적 연출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극히 강박관념적인 신드롬으로서, 소비자와 판매자 사이에서 발생한 오묘한 관계에서 서서히 파생되는 매우 특이한 마케팅 전략이다.

빌 게이츠가 세상에 뿌리는 상품들은 일단 소비자들에게 상업적인 가치를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다. 절대적인 소유욕을 유발시키는 마력이 함축되어 있는 이들 상품에 대한 MS사의 마케팅 전략은, 품질과 유통구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마니아층을 넓히기 위한 전략에 모든 역량을 투입하는 것이다.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라는 스티커를 부착하는 컴퓨터 제조업체들에게 일정 금액의 혜택을 제공하는 인텔사의 자체 홍보 캠페인과 MS사가 윈도 95의 출시에 쏟아부은 천문학적인 홍보 비용은 이들의 전략적 마케팅의 우선 순위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예라 볼 수 있다.

카운트다운을 불러일으키는 상품의 기본적인 공통점은 이들이 지닌 상업적 가치보다는 그 상품이 지닌 '혁명성' 내지는 '획기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비틀스의 마나아들로부터 <스타 워즈>의 마니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하루 이틀 늦게 이 상품을 접한다 한들 전혀 새로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모든 일상을 접고 침낭과 베개를 챙겨 기꺼이 줄서기를 하는 광경은 실로 글로써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모든 마니아적인 상품들이 똑같은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빌 게이츠의 윈도 95와 조지 루카스의 <스타 워즈>란 상품은 서로 마니아적 요소를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지만, <]스타 워즈>는 단면적인 상품으로 소비자들에게 일반 소비되면 그것으로 달아오른 소비성이 일단락되는 반면, 빌 게이츠의 윈도 95는 무한대의 응용성을 교두보로 사용자들에게 지속적인 소비를 부추기는 복합적인 상품이라는데 차이점이 있다. 이 차이점은 조지 루카스에게 할리우드의 영화감독들 중 최고의 부를 과시하는 제한적인 인물로 한계선을 긋는 반면, 빌 게이츠에게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부를 누리는 인물로 급부상할 수 있는 무한대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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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 Episode24

Author : 복구박사 복구박사 / Date : 2018.07.19 13:28 / Category : 데이터복구정보/IT NEWS

사진: 윈도우3.0 / 인텔 386프로세서 (윈도우와 인텔을 합쳐서 윈텔이라 부름)




Episode 24. 수면 위로 떠오른 윈텔 제국

1990년 윈도 3.0의 출시는 애플사는 물론이고 빌 게이츠와 비밀리에 'OS/2'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추진하던 IBM사에게도 일격을 가하는 윈텔 제국의 기습공격이었으며, 윈도 3.0의 성공적인 출하는 빌 게이츠와 앤디 그루브가 이끄는 윈텔 제국이 PC 시장의 모든 영역을 좌지우지하는 부동의 실권자임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계기로 되었다. 결과적으로 빌 게이츠가 MS사에서 추진한 운영체제 프로젝트의 상품화 과정에서 빅 블루 IBM사의 재가를 얻지 않고 독자적으로 수행한 첫 번째 프로젝트인 '윈도 3.0'의 기습 출시는 애플사에 그로기 펀치를 날리는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의 뒤를 돌봐준 IBM사를 안티-윈텔 진영으로 합류시키는 쿠데타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때부터 언론들은 윈텔이란 용어를 방송매체와 신문지상을 통해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PC 시장은 하드웨어 중심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게 된다.

윈도 3.0은 출시 첫 주부터 일반 사용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매킨토시 시스템의 아류작이라는 각종 언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데뷔 첫 해인 1990년 한 해 동안 일반 PC 사용자들을 상대로 3백만 개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고, 결국 PC 클론 시장에서 값비싼 매킨토시가 설 땅은 없어졌다.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콤비 플레이는 진정 프로들의 작품이었다. 윈도 3.0과 함께 출시된 인텔사의 386 프로세서는 사용자들의 체감 속도로 보자면 적어도 기존의 286 프로세서보다 2배 이상 빠른 스피드를 뿜어냈으며, 386 프로세서는 윈도 3.0과 환상궁합이 되어 PC 시장을 거침없이 장악해 나갔다. 1992년의 윈도 3.1과 486 프로세서, 1995년도의 윈도 95와 펜티엄 프로세서의 콤비 플레이를 통해 적어도 무어의 법칙이 그 효력을 다하는 순간까지 이들의 번영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한편 1990년 윈도 3.0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무렵, 팀 버너스 리(Tim Berners Lee)라는 무명의 영국 프로그래머에 의해 개발된 HTML(Hyper Text Markup Language)이라 불리는 새로운 언어 체계는 아무도 모르게 실리콘 밸리의 지각 변동을 암시하는 씨앗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여기에 우선 순위를 두고 프로젝트를 펼쳐나가는 실리콘 밸리의 기업은 하나도 없었다. 윈텔과 안티-윈텔 진영은 숨가쁘게 치닫고 있는 GUI 운영체제의 싸움에 모든 전력을 소비하고 있었을 뿐, 버너스 리의 HTML과 미 연방정부가 지난 20년간 관군(官軍)에게만 사용권을 부여한 인터넷의 상용화에 대해서는 대다수 밸리 기업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윈텔과 안티-윈텔 진영 모두를 혼돈의 세계로 이끄는 WWW 빅뱅으로 이어지게 된다. 여기서 빌 게이츠는 '모름지기 우선 순위를 정하라!'라는 실리콘 밸리의 새로운 원칙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닫게 되면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창헙 후 지금까지 이어온 연승행진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그대들이 무엇을 추진하던 간에 먼저 우선 순위를 정하라!" 스티븐 코비(Steven Covey)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 나오는 '우선 순위를 정하라!'라는 전략적 사고는 진정 실리콘 밸리의 모든 기업들을 향한 외침이었다. 실리콘 밸리는 패자부활전을 용납하지 않는다. 잘잘못을 가리지도 않고, 운이었는지 실력이었는지도 묻지 않는다. 다만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줄 뿐이다.

빌 게이츠가 윈도 95의 성공적인 출시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모든 프로젝트들을 백지화시키면서 인터넷 웹 브라우저의 성공적인 출시에 사활을 건 것도 바로 '우선 순위'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항아리에 주먹만한 자갈, 구슬만한 조약돌, 모래 그리고 물을 남김없이 모두 담으려 한다면 어떤 순서로 담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항아리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은 자갈, 조약돌, 모래, 물의 순으로 담는 방법 뿐이며, 이 순위를 무시하고 물이나 모래를 먼저 담게 되면 항아리는 이내 넘쳐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실리콘 밸리에서 이 우선 순위를 완벽하게 적용시켜 성공한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가장 완벽하게 우선 순위를 무시한 기업은 애플사였으며, 윈텔 제국은 대표하는 마이크로소프트사도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사이버 스페이스를 정점으로 밸리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90년대 중반 우선 순위를 혼동하는 절대절명의 실수를 범했다.

실리콘 밸리에서 선택은 소금과도 같다. 언제나 추가할 수 있지만, 녹아버린 후에는 결코 덜어낼 수 없다. 그 다음 '선택의 여지'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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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 Episode23

Author : 복구박사 복구박사 / Date : 2018.07.19 13:25 / Category : 데이터복구정보/IT NEWS

사진: 애플 뉴턴





Episode 23. 애플사의 크라잉 게임-이보다 더 무모할 순 없다.

아쿠아리우스 프로젝트로 인해 애플사에게 더 이상 연합세력은 의미가 없어졌으며, 그들의 전선은 이제 동서남북의 전방으로 확장돼 버렸다. 북부전선은 모토롤라사와 인텔사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 선전포고를 내린 상태였고, 남부전선은 앞으로 처절하게 펼쳐질 MS사와의 운영체제 전투에 대비해야 했다. 그런가 하면 벌써부터 전세가 꺾인 동부전선은 IBM PC 클론들과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서부전선은 HP사의 레이저 프린터와 어도비사의 서체 분쟁으로 소모적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애플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GUI 테크놀로지 운영체제는 MS사와 법정싸움에 휘말려 지루한 소모전을 치러야만 했고, PC 시장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개편시키게 될 객체지향 운영체제를 겨냥한 '핑크(Pink)' 프로젝트, 매킨토시 시스템에 음성 인식 기능을 추가시키는 '레드(Red)' 프로젝트, 오늘날까지 가장 우수한 GUI 운영체제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매킨토시 '시스템 7 & 8'의 모체가 될 '블루(Blue)' 프로젝트, 마이크로프로세서도 없이 RISC 체제의 차세대 운영체제를 추진한 '재규어(Jaguar)' 프로젝트, 그리고 펩시맨 스컬리를 벼랑으로 몰아간 차세대 PDA 기기를 꿈꾸던 '뉴턴(Newton)' 프로젝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출발 당시보다 서너 배 이상 몸통이 불어나 애플사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아쿠아리우스 프로젝트는 3년간의 준비작업에도 불구하고 인텔사와 모토롤라사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피부로 느끼면서, 애플사는 천문학적인 자금만 낭비한채 1989년 '도루묵 프로젝트' 1호로 공중분해 되어 버렸다. 또 스티브 잡스의 NeXT 운영체제와 함께 객체지향 프로젝트의 원조로 불리는 '핑크' 프로젝트는 서너 명의 엔지니어로 시작해 결국에는 재규어 프로젝트를 통합하면서 수백 명의 엔지니어들이 붙게 되어 애플사 최대의 프로젝트인 '파워PC'란 이름으로 상품화되지만, 애플사는 이것을 계기로 인텔 프로세서와의 영원한 결별을 알리는 동시에 한때 천적(天敵)으로 간주됐던 IBM사와 실익없는 동맹관계를 형성하면서 밥 노이스와 빌 게이츠가 이끄는 '윈텔 제국'을 수면 위로 떠올리게 된다.

애플사의 유일한 효자 프로젝트였던 '블루'가 이끌어가는 '시스템 7'의 보급형 매킨토시 상품들인 클래식, LC, Si, Ci 그리고 Fx 기종들은 나머지 프로젝트들의 도루묵화에 의해 야기된 천문학적인 손실을 떠안으며 최후의 마지노선을 긋게 되지만, 윈텔 진영의 386 프로세서와 MS사의 '윈도 3.0'의 화력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탈진된 상태였다. 1990년 윈텔 진영의 PC 시장 점유율을 90퍼센트를 웃돌았으며, 애플사의 시스템은 더 이상 PC 시장의 유일한 GUI 운영체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1989년 매킨토시 최초의 노트북 모델로 시장에 선보였던 매킨토시 포터블(Mac Portable)의 참패는 장 루이 가세를 애플호에서 이탈시켜 버렸으며, PDA라 불리는 신개념의 초소형 컴퓨터로 매킨토시에 버금하는 PC 혁명을 꿈꿨던 뉴턴마저도 사용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면서 존 스컬리의 무모한 오디세이는 1993년을 끝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애플사와 '안티-윈텔' 진영의 궁극적인 몰락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아쿠아리우스 프로젝트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아쿠아리우스가 일단 성공하면 애플사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분야를 모두 커버하는 완벽한 회사가 될 수 있지만, 만에 하나 실패로 끝나게 된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크라잉 게임'을 요구했다. 닐 조단의 역작 <크라잉 게임>에 나오는 '전갈과 개구리'의 일화처럼, 애플사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전갈의 길을 답습하고 있었다. 개구리의 등에 업혀 물길을 지나는 과정에서 전갈은 난데없이 개구리의 등에 독침을 쏘게 된다. 냇물 한가운데서 독침을 맞은 개구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왜, 하필이면 여기서....."라며 반문하지만 물 속으로 함께 침몰하던 전갈은 개구리에게 이렇게 답변한다. "이건 내 본능이야! 나도 어쩔 수 없었단다."

애플사는 이렇게 PC 혁명의 혈맹이었던 모토롤라사의 등에 독침을 쏘면서 무모하게 침몰해갔다.

돌이켜 보건데, 애플사가 80년대에 추진한 테크놀로지들은 실로 대단한 것들이었다. PC 시장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매킨토시의 GUI 테크놀로지를 시작으로 멀티태스킹과 객체지향 운영체제, 포스트스크립트 언어, RISC 프로세서 그리고 뉴턴으로 대변되는 PDA 기기는 지난 10년간 실리콘 밸리가 궁극적으로 추진하게 될 모든 분양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애플사의 이러한 실험정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디지털 문명의 현주소는 지금보다 훨씬 퇴보된 위치에서 공전을 거듭하고 있었을 것이며, 적어도 애플사가 이룩한 기술적인 업적은 그 누구도 평가절하할 수 없는 실리콘 밸리의 역사인 것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애플사의 이 모든 공로에 아무리 후한 점수를 준다고 하더라도, 80년대 중반과 후반에 걸쳐 추진된 애플사의 프로젝트들은 실리를 무시함은 물론 명분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채 대부분 도루묵 프로젝트들로 전락되면서, 최악의 결과인 윈텔 제국의 독과점을 앞당기는 일등공신이 되어버렸다. '안티-윈텔 진영'의 비극은 윈도 3.0 출시를 기점으로 무너져버린 시장 점유율이 아니라 아직까지 애플사라는 회사가 윈텔 제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회사라는 사실이다.

1995년 윈도 95라는 거대한 버섯구름이 쿠퍼티노의 심장부인 애플타운의 하늘을 뒤덮을 때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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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 Episode22

Author : 복구박사 복구박사 / Date : 2018.07.19 13:23 / Category : 데이터복구정보/IT NEWS





Episode 22. 코페르니쿠스의 항해

80년대 실리콘 밸리의 주인공은 단연 애플사다. 80년대 초반 퍼스널 컴퓨터가 태동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가 완숙단계에 접어든 90년대 초반까지 애플은 불행하게도 밸리의 모든 대형 사고들을 대변해왔다. 실리콘 밸리에서 R&D는 보험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다. IBM, HP, 인텔과 같이 각자의 분야에서 선두 자리에 있는 기업들은 매년 순이익을 기준으로 일정한 자금을 할당하여 급변하는 미래를 대비하는 치원에서 R&D란 이름의 보험을 들고 있다. AT&T사의 벨연구소와 루센트테크놀로지 연구소, IBM사의 순수과학연구소 그리고 제록스사의 파크연구소 등은, 이 거대 공룡 조직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보험의 임무를 띄고 천문학적인 자금을 소모하는 대표적인 소비집단이다.

실리콘 밸리의 '볼륨 원칙'은 이들 대표기업들에게 지속적으로 밸리의 시장 규모, 즉 볼륨을 넓히지 못하면 수평선 끝으로 추락할 수 밖에 없다는 '코페르니쿠스의 항해'를 묵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IBM사의 SQL 언어, 벨연구소의 유닉스 운영체제, 파크연구소의 GUI, 이더넷, 그리고 포스트스크립트 언어 등은 모두 이들 공룡 집단들이 디지털 시장을 팽창시키기 위해 보험의 의미로 추진된 프로젝트들이다.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없었다면 이들의 항해는 벌써 벼랑 끝으로 추락해버렸을 것이다. 물론 누구도 예상치 못하는 미래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최상의 대비책은 예상 가능한 모든 테크놀로지들에 대한 프로토 타입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젝트들의 프로토 타입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요구하며, 따라서 공룡 기업들의 자금력이 아니면 도저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대부분의 신생기업들에게는 단지 '꿈의 시나리오'에 불과한 것이다. 애플사의 무모함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가 밸리의 미래를 기약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애플사는 이들 공룡 기업들에 의해 운항되던 '코페르니쿠스의 항해'의 선봉장 역할을 자청하고 만다. "여기까지는 안전하니 나를 따르라!"라는 한 마디가 그렇게 중요했던가! 진정 이보다 더 무모한 도전은 없었다. 판돈만 수천 억 달러에 달하는 지존들의 세력 싸움에 '넘버3'가 낄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1985년 애플사를 이끌게 된 존 스컬리와 장 루이 가세는 기교파 장사꾼들이었을 뿐 결코 엔지니어는 아니었으며, 이들의 방황은 '포스트 스티브 시대'의 애플사를 하루 아침에 비전을 상실한 회사로 전락시켜버렸다. 데이빗 리카도의 두 가지 능력을 서로 반쪽씩 소유했던 '두 명의 스티브'의 동반 하차가 애플사의 몰락을 예고하긴 했지만, 그 누구도 이와 같은 무모한 도전에 의해 애플이 추락하는 시나리오는 예상치 못했다. 펩시맨 존 스컬리는 불행하게도 실리콘 밸리와 디트로이트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컬리는 1985년부터 뉴턴(Newton) PDA 단말기의 실패로 애플사에서 해고되는 1993년도까지 약 8년 동안, 차라리 세상의 빛을 보지 않는 편이 나았을 수십 개의 '도루묵 프로젝트'들에 10억 달러 이상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허공에 뿌려진 이 천문학적인 투자액은 기존의 공룡 기업들이 따로 보험료의 의미로 떼어놓은 것이 아니라 애플사의 생계비와도 같은 것이었으며, 이 부담은 결국 죄 없는 매킨토시 사용자들에게 전가되면서 매킨토시는 소생 불가능한 치명타를 받게 된다.

존 스컬리는 애플사의 사령관으로 부임하자마자 R&D 비용을 두 배로 늘리기 시작한다. 1985년 1억 달러를 약간 웃돌던 애플사의 R&D 비용은 2년만에 2억 달러를 넘어섰고, 애플사의 실낱같은 재기 가능성에 쇄기를 박게되는 1989년에는 자그마치 4억 달러가 넘는 금액을 매킨토시에 쏟아붓게 된다. 하지만 애플사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콩을 심을 때 팥을 심고 있었다. 잡스의 리사와 매킨토시 프로젝트가 애플사의 '나 홀로 프로젝트'의 시발점이었다면, 1986년 추진된 '아쿠아리우스(Aquarius)'라는 코드명의 프로젝트는 앞으로 8년간 지속된 스컬리의 고통스러운 오디세이를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즉, 이 사건은 "밸리의 어떤 회사도 애플사보다 무모할 수는 없다"는 메세지를 만방에 알리기에 충분했다.

코드명 아쿠아리우스는 모토롤라의 진척없는 68000 시리즈 프로세서에 대한 염증과 날로 사세를 확장해가고 있는 인텔사의 독주에 위협을 느낀 애플사의 작은 반란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당시, 실리콘 밸리의 대표적인 CPU 생산업체 중 하나였던 모토롤라는 GUI 운영체제의 복합 그래픽을 원활하게 운용하기엔 역부족인 프로세서를 매킨토시에 공급해왔고, 매킨토시가 실질적으로 사용자들에게 강력한 컴퓨터로 인식되기 위한 최저의 연산 속도를 갖춘 68040 프로세서는 모토롤라의 내부 사정으로 그 출시 시기가 기약없이 늦춰진 상태였다. 결국 스컬리는 "모든 것은 우리가 한다"라는 특유의 배짱으로 '아쿠아리우스'라고 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탄생시키기 위한 물밑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아쿠아리우스 프로젝트는 기존 인텔사와 모토롤라사 제한적인 CPU 생산방식인 CISC 방식에서 무한대의 가능성을 보유한 RISC 방식의 프로세서로 전환을 검토했으며, 더 나아가 한 대의 매킨토시에 4개의 CPU를 복합적으로 포함시키는 멀티 CPU 프로세서 체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스컬리는 과연 누구를 위한 컴퓨터를 만들 작정이었던가? 그 당시 퍼스널 컴퓨터 프로세서 시장에 RISC란 개념은 아직까지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고, 멀티 CPU 프로세서는 슈퍼컴퓨터의 대명사인 크레이(Cray) 컴퓨터에만 제한적으로 시도된 메인프레임 테크놀로지가 아니었던가! 실리콘 밸리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적(敵)을 갖고 있었던 애플사가 지난 10년간 PC 혁명의 동지로서 한 배를 탔던 모토롤라사에 도전장을 던진 이 사건은 스컬리가 이끄는 애플사의 오디세이가 얼마나 무모한 항해였던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동시에 GUI 운영체제의 보편화라는 실리콘 밸리의 절대절명의 과제는 앤디 그루브와 빌 게이츠가 이끄는 '윈텔 제국'에 그 명분을 넘겨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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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 Episode21

Author : 복구박사 복구박사 / Date : 2018.07.19 13:21 / Category : 데이터복구정보/IT NEWS

사진: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 빌 게이트, 폴 앨런





Episode 21. 그들만의 리그

1985년 스티브 잡스를 떠나보낸 애플사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살얼음판을 걷기 시작한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갖고 추진한 매킨토시 컴퓨터는 스티브 잡스의 몰락과 함께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고, 애플사의 자금 흐름에 열쇠를 쥔 애플 시리즈들은 더 이상 사용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MS사의 도스 운영체제와 인텔사의 X86 시리즈 프로세서가 엔드 유저들에게 부동의 표준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80년대 중반, 애플사의 딜레마는 처참했다. 불과 5년 전 혜성처럼 나타나 PC 시장을 창출해낸 워즈니악의 애플 시리즈들은 더 이상 IBM PC 클론을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구식 컴퓨터로 전락했고, 새로운 미래를 기약했던 매킨토시는 현실을 초월해 버린 황당한 컴퓨터로 인식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우리가 한다", "여기서 발명되지 않은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라는 식의 독선적인 애플의 태도는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실리콘 밸리에서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굳혀갔을 뿐이었다. 당시 애플을 일컫어 "얼터너티브"적인 회사라고 했는데, 사실 이 표현은 너무나 관대한 것이었다. 마우스와 풀다운 메뉴 방식의 환상적인 인터페이스는 아닐지라도, 실리콘 밸리의 PC 클론들은 대부분의 엔드 유저들을 만족시켰고, 또 도스를 축으로 불붙기 시작한 사무자동화(Office Automation)의 붐은 전문 PC 시장의 한 축을 형성하기 충분했다. 즉, 수직적으로는 메인프레임, 중형 워크스테이션, 엔드 유저 플랫폼의 PC 시장으로, 수평적으로는 운영체제, 애플리케이션, 주변기기 시장으로 확산되면서 매우 다양하고도 복합적인 먹이사슬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PC 시장의 대중화에 도화선이 된 미치 카포의 '로터스 1-2-3' 스프레드시트를 시작으로 운영체제와 랭귀지(베이식, 파스칼, 포트란, C 등) 시장은 MS사가 부동의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SQL(Structured Query Language) 언어를 기반으로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시장을 구축한 오라클(Oracle)사, 이더넷 테크놀로지의 장점을 살려 서버와 클라이언트 체계의 LAN을 보편화시킨 노벨(Novell)사, 네트워크간의 데이터 체계를 연결시키는 라우터(Router) 테크놀로지로 인터-네트워킹 시장을 탄생시킨 시스코(Cisco)사 그리고 포스트스크립트라 불리는 마법의 서체 언어로 전자출판 시장을 석권한 어도비(Adobe)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80년대 중반 PC 시장에서 독창성과 전문성을 주체로 내세운 '그들만의 리그'를 탄생시켜 버렸다. 또한 RISC 프로세서를 기반으로 엔드 유저 플랫폼의 서버 역할을 담당한 유닉스(UNIX) 운영체제는 실리콘그래픽스사에게 비주얼 그래픽 시장을 새롭게 열어주었고, 할리우드 영화의 생동감 넘치는 특수효과를 가능케 했으며, 썬(SUN, Stanford University Network)사의 유닉스 기반 운영체제 솔라리스(Solaris)는 네트워크 시장에서 부동의 서버로 자리잡으면서 인터넷의 빅뱅으로 실리콘 밸리가 또 다시 팽창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씨스코사와 함께 인터넷과 인트라넷 서버 네트웍스 시장의 선두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여기서 '그들만의 리그'는 완숙기에 접어드는 실리콘 밸리의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즉, '윈텔과 안티-윈텔' 진영의 힘의 균형을 조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이들 리그의 파워가 나날이 커지게 됨에 따라, 스핀오프되는 테크놀로지 회사들의 가치가 종종 이들이 속해 있는 리그의 규모나 가능성, 팬(유저)들의 기대치에 의해 판가름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90년대 중반 인터넷의 빅뱅으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인터넷 관련 기업들의 실제 가치를 측정하는 데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디지털 경제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 좀 더 직설적으로 다우 종합 주가 지수를 '꿈의 일만 포인트'로 끌어올리는 일등공신이 더 이상 생상력과 품질관리가 전부일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나아가 그러한 시각에서 투자자들을 '블루 칩' 시장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실리콘 밸리에서 한 회사가 '그들만의 리그'를 창출하려면, 소위 말하는 데이빗 리카도(David Ricardo)의 두 가지 재능이 있어야 한다. 데이빗 리카도는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독학생이었지만, 천재적인 경제학 이론으로 물질 문명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시켜 백만장자가 된, 매우 보기 드문 학자 겸 사업가이다. 마샬(Marshall)과 케인스(Keynes)가 천재적인 경제학자였다면, 리카도는 천재적인 경제학자인 동시에 뛰어난 장사꾼이었다. 실리콘 밸리는 바로 이러한 데이빗 리카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곳이다.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천재적인 비전을 보여주어야 하고, 이 비전을 보편화시킬 수 있는 장사꾼 기질이 있어야 한다. 즉, 무어의 법칙에 의해 18개월을 주기로 모든 것이 두 배로 가속화되는 밸리의 변경에서, 벤처리스트들은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상업화시킬 수 있는 장사꾼 기질을 입증해야만 했다. 밥 노이스와 빌 게이츠는 이 두 요소를 모두 갖춘 경우이고, 쇼클리와 킬달은 두 요소 중 후자가 없었기에 '그들만의 리그'를 창출하지 못한 경우이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를 통해 형성된 '그들만의 리그'의 진정한 실체는 무에서 유를 창출해내는 독창성이라기 보다는 한번 플레이그라운드가 형성되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면역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그들만의 팬들'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바꿔 말 할 수 있다. "아이디어는 훔쳐가도 시장을 훔쳐갈 수 없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이들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그리고 정보 서비스라 불리는 세 가지 영역 중 하나를 택해 자신들이 실리콘 밸리의 '최고'이기보다는 '최다'임을 입증하는데 주력했다. 인텔과 MS는 각각 세계 최다의 마이크로프로세서(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생산업체이며, 오라클은 세계 최다의 데이터베이스 정보 서비스 업체이다. 물론 최다가 결코 최고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리콘 밸리의 변경을 좌지우지한 대부분의 테크놀로지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윈텔 제국'이 아닌 '안티-윈텔' 진영의 끝없는 방황에서 사고 발생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어느 곳이든 기본 원칙은 철저하게 지켜지는 법이고, 실리콘 밸리에서는 철저한 분업이 원칙이다. 밸리는 구조적으로 모든 방면에 뛰어난 팔방미인이 생존하기에는 너무나 치열한 먹이사슬 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극단적으로 두 가지 이상의 정체성을 거부한다. 이 분업의 절대 원칙은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을 서로 연대시켜 연합체제를 형성시키거나, 그 반대로 이들을 경쟁시켜 대결구도로 이끌게 된다. 세분화된 분업체계를 무시하면 그 기업의 미래는 없다는 것을 밸리는 역사를 통해 증명해왔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한 가지 이상의 신분증을 지닐 수가 없다. 지난 20년간 밸리는 최고의 상품과 엔지니어들을 헌 신짝처럼 내팽개쳐 왔고, IBM의 'The PC'의 출현은 독창성과 전문성을 방어막으로 내세운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하는 것이 또 다른 아마겟돈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는 교훈을 밸리에 보여주었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새로운 국가의 탄생이나 혁명을 통해 모든 것이 새로운 질서를 잡아갈 무렵이면, 어느 곳에도 융화될 수 없는 조직과 인물이 등장하곤 했다. '그들만의 리그'란 대세가 실리콘 밸리의 모든 영역을 파티션해 나가는 80년대 중반 모든 컴퓨터 회사들이 이 새로운 흐름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대세를 거슬러 올라간 대표적인 기업은 빅 블루 IBM과 영원한 밸리의 반항아 애플사였다. 특히 8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이어진 애플사의 무모한 '나 홀로 프로젝트'들은 '자멸'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고, 90년대 초반 '그들만의 리그'가 독보적인 네티즌 제국으로 승화될 무렵 자신의 초라한 실체를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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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 Episode20

Author : 복구박사 복구박사 / Date : 2018.07.19 13:18 / Category : 데이터복구정보/IT NEWS




Episode 20. 무너진 3인방 체제와 대답 없는 매킨토시


실리콘 밸리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대표적인 회사의 창립과 성장과정을 보면 '3인방' 체제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시작을 알린 HP에는 빌 휴렛, 데이빗 팩커드, 그리고 프레드 테르만이 있었고, 인텔사에는 밥 노이소, 고든 무어 그리고 앤디 그루브가 있었으며, 마이크로소프트사에는 빌 게이츠, 앨런 폴 그리고 스티브 발머가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핵심 기업들은 초장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이들 '테크노 3인방'체제에 흔들림이 잆었다.

하지만 애플사는 달랐다. 스티브 워즈니악, 스티브 잡스, 그리고 마이크 마큘라로 구성된 최초의 3인방 체제는 단 5년을 넘기지 못했다. 1981년에 워즈니악을 잃었고, 1985년에는 잡스를 쫓아내 버렸다. 1985년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GUI 시장에서 선두주자로 나설 수 있는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 분열로 스스로 자폭의 길을 택한 애플사는 매킨토시라는 혁명적인 컴퓨터를 성공적으로 개발해냈음에도 불구하고, PC 시장을 퇴보시키고 스스로도 퇴보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스티브 잡스의 애킨토시는 충분히 윈텔 진영과 맞서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휼륭한 제품이었다. 따라서 애플사의 3인방 체제가 견고하게 유지되었다면, PC 시장은 지금보다 훨씬 안정적인 구조로 발전했을 것이다. 당연히 일반 사용자들은 보다 저렴한 가격에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며 운영체제의 경쟁 구도로 인해 사용환경도 훨씬 편리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애플사는 모든 것을 혼자 얻으려 했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었다. 초창기 퍼스널 컴퓨터를 보편화시키겠다는 '두 명의 스티브'의 야심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실리콘 밸리와는 무관한 경영진들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된 애플사는 '3인방'의 분열 이후 단 한번도 그들의 위상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 애플사의, 아니 스티브 잡스의 지극히 개인적인 실수는 그 후 10년 동안 도미노 현상처럼 모든 PC 산업 전체에 영향을 끼쳤으며, 1985년 애플사를 등지며 떠나는 그를 아쉬워하는 애플사의 직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매킨토시를 중심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려 지속된 잡스와 애플사의 실패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스컬리와의 마찰보다는 훨씬 원론적인 곳에 그 이유가 있었다. 잡스는 매킨토시 비전을 상품화하는데 모든 정열을 쏟았을 뿐 정작 가장 중요한 매킨토시의 보편화 부분은 소홀히 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많은 사람들은 잡스가 애플사를 떠난 후 스컬리와 마큘라가 미온적으로 취한 매틴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선스 시비에 실패의 일차적인 책임을 떠넘기고 있지만, 사실 리사란 프로젝트는 애당초 애플사의 R&D 규모에서 소화해 낼 수 있는 스케일의 프로젝트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잡스는 리사와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PC 시장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절대절명의 실수를 범했다. 리사와 매킨토시 프로젝트는 애당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로 분리되어 추진됨이 옳았다. 애플사의 규모에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무리였으며, IBM사의 OS/2가 입중하듯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회사는 실리콘 밸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애플사가 소프트웨어 분야를 독립 회사로 키워나갔다면, 1992년 윈도 95와 정면 충돌을 예고하다 절반의 쿠데타로 그친 매킨토시 OS의 인텔 플랫폼 프로젝트였던 스타트랙(Star Trek)은 틀림없이 성사되었을 것이며, 매킨토시 OS는 지금 보다 훨씬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모토롤라 파워PC 프로세서는 물론, 인텔 기반의 프로세서로도 효율적으로 운용되면서 윈도 운영체제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빌 게이츠가 오피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애플리케이션에 양다리 정책을 펼쳐왔듯이, 애플사도 필연적으로 인텔 호환 칩에 매킨토시 OS의 승부수를 띄웠어야만 했다. 윈도 95가 출시되었을 때, 대부분의 매킨토시 애플리케이션들은 마치 리그에서 제명되었다 부활된 선수들처럼 윈도 플랫폼 리그로 철새들처럼 이동해 버렸다. 애플사의 전자출판 시장과 오디소/비디오 시장의 영원한 혈맹으로 간주되었던 어도비사의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알더스사의 페이지 메이커, 매크로미디어사의 디렉터 등의 애플리케이션들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플랫폼의 이동을 순식간에 단행해버렸고, 애플사는 이제 모든 것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최악의 상황으로 스티브 잡스의 아이맥이 혜성처럼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코마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매킨토시 OS는 인텔 프로세서의 플랫폼에 완벽하게 적용될 수 있는 알고리즘을 지니고 있었다. 애플사에서 스핀오프된 대표적인 두 회사인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스텝(NeXT Step)과 장 루이 가세(Jean Louis Gassee)의 비오에스(Be OS)는 애플사 엔지니어들의 10분의 1도 안되는 인력으로 보란 듯이 인텔 프로세서에 GUI 운영체제를 선보이면서, 애플사가 얼마만큼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기업인가를 전세계에 여실히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만약 잡스가 매킨토시 OS를 리사 프로젝트와 독립하여 진행하였다면, 스티브 잡스는 존 스컬리와 한 배를 탈 수 있는 명분을 만들 수 있었고, 애플사는 델사나 컴팩사처럼 스컬리의 천재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하드웨어를 판매하는 회사와 잡스의 비전으로 윈도 시리즈를 포함한 어떤 플랫폼에서도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회사로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잡스와 스컬리의 싸움이 극에 달했던 1985년 여름, 애플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지난 5년간 애플사의 자금줄을 담당하던 워즈니악의 애플 시리즈는 수명을 다했고, 쉬운 컴퓨터를 내세웠던 매킨토시 128K 모델은 컴퓨터를 처음 접하는 초보 사용자들에게 호응 받기보다는 PC 플랫폼의 난해한 도스 아키텍처에 염증을 느낀 포스트 PC 사용자들에게 어필함에 따라, 잡스가 애당초 원한 매킨토시의 비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 첫걸음을 내딛고 말았다. 물론 때마침 불어닥친 레이저 프린터 기술과 GUI 플랫폼이 지닌 장점 중의 하나인 그래픽과 텍스트를 융합할 수 있는 레이 아웃 포맷 테크놀로지는 애플사에게 실낱 같은 희망을 주며 전자출판 시장을 개척해 주었다. 하지만 포스트스크립트로 대변되는 존 워낙(John Warnock) 사단의 어도비 테크놀로지는 쓰러져 가는 애플사에 단비 역할을 할 수 있었을 뿐, 잡스가 애초에 구상한 차세대 운영체제의 보편적인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최고'와 '최초'의 개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최다'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말았다. 1985년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세운 애플사를 떠날 때까지도, 실리콘 밸리의 제1의 생존 원칙을 경시했다. 잡스가 이 볼륨의 원칙을 숭배하기까지 애플사는 12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고, 그가 돌아왔을 땐 이미 깃발은 쓰러지고 둥지만 남아있었다. 1985년 9월 스티브 잡스는 애플사의 주주 총회에서 스컬리에게 직격탄을 던졌다. "당신은 결코 애플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다" 잡스가 애플사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던진 이 한 마디는 존 스컬리의 심장을 강타했고, 애플사가 곤경에 빠질 때마다 스컬리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워즈니악과 함께 홈브루 컴퓨터 동호회에서 애플컴퓨터를 탄생시키며 퍼스널 컴퓨터 시장을 개척했고, IBM PC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GUI라는 새로운 비전으로 또 다시 한번 세상을 변모시킨 스티브 잡스는 정든 쿠퍼티노의 밴들리 식스 빌딩을 빠져 나오면서, 밑지긴 했지만 아직 거덜나지 않은 장사꾼의 마음으로 또 다른 한 판을 준비하게 된다. 두 번이나 밸리의 변경을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하다 내분으로 좌초하게 되는 1985년 9월, 스티브 잡스는 걸어온 길보다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먼 스물 아홉의 피끓는 청년이었다.



Tags :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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